월본국 내각총리대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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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본국 제4·15대 내각총리대신 모창민 牟昌民 | Changmin M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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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943년 8월 15일 |
| 도유부 도유시 신관야구 신번연 (현 도유수도시 신관야구 신번연1동) | |
| 사망 | 2021년 1월 20일 (향년 77세) |
| 도유수도시 선화구 세이와대학병원 | |
| 재임기간 | 제4대 내각총리대신 |
| 1986년 8월 15일 ~ 1989년 5월 15일 | |
| 제15대 내각총리대신 | |
| 2006년 1월 15일 ~ 2006년 3월 1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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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모창민은 월본의 정치인이자 제4, 15대 내각총리대신이다.
생애
1943년 도유에서 태어났으며 도유대학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1969년 WBS에 입사하여 구창모 당시 앵커랑 같이 근무하였고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 뒤 월본민주화협의회 설립에도 참가하여 도유 지부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는 등 구창모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민주화 이후 자유민주당에 가담하여 국회의원이 되었고 보수본류, 특히 구창모계의 좌장으로 활동하였다. 구창모 퇴임 후 후계자로 지명되어 월본 제4대 총리로 취임, 당대 기준 역대 최연소 총리가 되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3년간 총리직을 역임하였다. 구창모가 쌓은 현대 월본의 틀을 이어받아 그 기조를 지속하였다. 당시 월본 총리 중 가장 높은 지지율인 94%를 기록하였고, 자유민주당 지지율은 86%로 고공행진을 이어갔었다. 즉 월본의 황금기라 불리는 "구창모창민" 시대의 한 축이였다. 이외에는 정관겸직 허용조치, 지방자치제 전면 실시, 기업인 포럼 개최 등의 정책을 실시했고 정치 활성화 등을 추진했다. 주요 경제 정책으로 모창민노믹스를 실시했다. 모창민노믹스는 부동산 시장ㆍ주식시장 구축, 기업 지원, '마리아나' 경제 공동체 시장 구축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2006년 구창모발 자민당 내 소규모 정계개편 당시 한 축으로 활동하여 보수본류 계열 계파인 월본의힘을 만들었고 보수방류 계열 파벌인 열린월본의 묵인으로 총리직에 복귀한다. 총리직 2기 당시에는 모창민 독트린 발표나 '오록스 플랫폼' 가입, 지방자치제 개혁 등을 추진하였고 약 2달의 임기 후 자신이 후계자로 지목한 나의재에게 총리직을 사실상 넘긴 뒤 퇴임한다.
그 뒤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였으며 월본TV방송협회 상임고문 등 직책을 지냈다. 2021년 1월 20일 서거하였다.
평가
긍정적 평가
역대 월본 총리 중 지지율이 제일 높은 총리(94%)이며 구창모 전 총리의 유산을 잘 계승하고 발전시켜 외교나 경제적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외교에서는 동남아 국가를 비롯한 아시아 시장에서 협력국을 확대했으며, 마리아나 경제 공동체 시장의 초석을 잘 준비했다는 호평을 받았고 경제에서는 모창민노믹스와 친기업 정책으로 월본 대기업의 시장 진출에 도움을 주었다는 평가이다.
2018년 11월 26일 실시된 "월본인에게 묻는다. 2018 월본!" 조사에서 역대 총리 지지율 21.28%로 구창모에 이어 2위를, 월본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에서는 9.62%로 3위에 선정되었다. 사실상 넘사벽급인 구창모와 세이카 천황을 제하면 국민들에게 은근히 많은 지지를 얻은 총리라고 할 수 있다.
즉 결과론적으로는 우선은 무난하고 안정적이면서도 성과는 있는 국정 운영으로 무난히 발전했던 시기가 모창민의 월본 총리 시대였다.
부정적 평가
일각에서는 제대로 한 일이 없이 말만 거창하게 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모창민노믹스에 대해 "페이퍼 플랜"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였으며 개인적 구설수로 인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소속 정당
| 소속 | 기간 | 비고 |
|---|---|---|
| 무소속 (월본민주화협의회) |
1975 - 1980 | 정계 입문 |
| 자유민주당 | 1980 - 2021 | 창당 정계 은퇴 사망 |
선거 이력
어록
여담
- 잘 생겼다. 출중한 외모로 1980년대 자민당 선거 유세의 간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총리 재임 시기의 고지지율 역시 이러한 외모의 덕을 본 것이 없지 않아 있단게 정설이다. 그러나 본인은 평생 여자친구나 배우자 없이 독신으로 살았다.
- 총리관저에서 실내 테니스를 치다가 실수로 TV를 깨부신 적이 있다. 해당 TV는 기왕에 자신의 사비로 최신 벽걸이 TV로 교체하는 것으로 해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