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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국신민회 정변
정변에 성공하여 이튿날 중앙청으로 진격하는 반란군
날짜
1963년 12월 23일 ~ 12월 26일
장소
월본 월본 도유시 중앙구
원인
기요코지 내각 부정부패, 군-정 갈등
교전 세력
반란군 진압군
황국신민회
황국신민회장 스기야마
육군 보안부 구로다 겐스케
육군 보안부 시로 히사시
육군 수도군 참모장 안도 코지
육군 수도전차군 사령관 아사이치
제33 공수특전 사령관 요시다
제38 공수특전 사령관 하치로
육군 군수사령부 다나카
공군 참모장 칸신
민주공명회
내각총리대신 기요코지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
겸 내무대신
후미오
메이우 천황
국방대신 미네오
육군 참모장 요시마사
해군 참모장 곤도
제36 공수특전 사령관 오구리
제35 공수특전 사령관 마사노부
경시청장 사토 카이토
결과
쿠데타 성공, 진압 실패
영향
민주공명회 해산, 황국신민회의 정국 장악

개요

황국신민회 정변 사건은 1963년 12월 23일 월본국 수도 도유시에서 발생한 군사 쿠데타 사건으로, 육군 중장 구로다가 주도한 군 병력이 당시 내각집무실이었던 중앙청을 장악하고 기존 내각을 붕괴시킨 사건이다. 본 사건으로 당시 내각총리 기요코지는 중앙청 내에서 사살되었으며, 내무대신 후미오는 반란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쿠데타는 단기간 내에 계획적, 조직적으로 수도 핵심 시설을 장악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사건 직후 군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비상통치위원회를 설치하였다. 국회와 정당 활동은 즉각 중단되었으며, 언론과 통신은 군의 통제 하에 놓였다.

배경

1960년대 초 육군 내에서 구로다는 능력과 경력에 비해 장기간 진급이 정체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구로다는 여러 전선 및 참모 보직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기요코지 내각 출범 이후 주요 요직에서 배제되었다. 기요코지 내각은 미국의 지지를 받으면서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고 군의 막강한 권력을 해체하는 등 군의 힘을 뺐고 일부 장성들의 정치 활동을 문제 삼았다. 이 과정에서 구로다는 내각과 지속적인 인사 갈등을 겪었다. 특히 국방 관련 인사안에서 구로다의 이름이 반복적으로 제외되자, 그는 이를 명백한 정치적 견제 조치로 받아들였다. 이후 구로다는 자신의 입지를 회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황국신민회에 가입하였다. 구로다는 황국신민회를 기반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군 내부로 확장하려 하였다. 그는 황국신민회 소속 정치인들과 접촉하며, 간접적인 정치 후원을 통해 진급을 도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곧 민주공명회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민주공명회는 군과 정치의 유착 가능성을 문제 삼으며 구로다의 정치 활동에 대한 내부 감찰에 착수하였다. 감찰 과정에서 구로다와 정치권 인사 간의 접촉 기록이 보고되었고, 이는 군 수뇌부에도 전달되었다. 군 내부에서는 구로다의 정치적 행보가 군 기강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그 결과, 1963년 말 구로다를 육군군수학교장으로 전보 발령하는 방안이 비공식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해당 보직은 명목상 교육직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지휘권에서 배제되는 좌천성 인사다. 이 같은 발령 소식이 구로다에게 전달되자, 그는 이를 자신의 군 경력에 대한 사실상의 종결로 받아들였다. 이후 구로다는 기존의 진급을 통한 영향력 확보를 포기하고, 보다 직접적인 권력 장악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구로다는 군 내부에 이미 존재하던 황국신민회 성향 장교들과의 연계를 강화하였다. 그는 이들을 중심으로 비공식 모임을 조직하며, 현 정치 체제가 군의 명예와 국가 질서를 훼손하고 천황께 물의를 빗고 있다는 인식을 공유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군사적 행동을 통한 정권 교체 구상이 점차 구체화되었다. 결국 구로다는 좌천 인사 발령이 공식화되기 이전에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고, 이를 계기로 1963년 12월 쿠데타 계획이 본격적으로 수립되었다.

쿠데타 발발

구로다를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은 쿠데타 실행에 앞서 수도의 핵심 권력 거점에 대한 사전 분석을 장기간 진행하였다. 중앙청, 주요 방송국, 국가 통신 시설, 그리고 수도 주둔 부대의 지휘 체계와 병력 배치 현황이 면밀히 파악되었으며, 특히 평시와 연말 휴무 기간의 경비 차이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중앙 행정기관의 대응 능력이 연말을 전후로 현저히 저하된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쿠데타 계획은 이러한 행정 공백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향으로 수립되었다. 군부는 크리스마스 연휴 직전인 1963년 12월 23일을 실행일로 확정하였으며, 이는 관료 다수가 휴가에 들어가고 정치 지도부의 경계가 느슨해지는 시점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날 황국신민회 정기 간부 회의가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 역시 중요한 고려 요소였다. 이 회의로 인해 주요 정치 인사들이 중앙청 인근에 집결할 가능성이 높았고, 이는 군부가 단시간 내에 핵심 인물들을 통제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였다.

1963년 12월 23일 오전 4시경, 구로다는 수도 외곽에 주둔 중이던 육군 병력에 대해 ‘비상 경계 훈련’ 명목의 이동 명령을 하달하였다. 해당 명령은 통상적인 훈련 지시 형식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하급 장교와 병사들 사이에서는 실제 작전임을 인지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병력은 새벽 시간대를 이용해 주요 간선 도로를 따라 수도 중심부로 이동하였으며, 군 헌병대가 교통 통제와 민간인 접근 차단을 담당하였다.

오전 6시 이전까지 중앙청을 둘러싼 주요 교차로와 통신 거점은 모두 군 병력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 이와 동시에 국가 통신 시설 일부가 장악되면서 정부 고위 인사 간의 긴급 연락은 사실상 차단되었다. 수도 경찰은 명확한 지시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소극적으로 대응하였고, 조직적인 저항은 발생하지 않았다.

중앙청 진입

오전 7시 30분경, 구로다가 직접 지휘하는 주력 부대가 중앙청 본관으로 진입하였다. 당시 중앙청 내부에는 내각총리 기요코지와 일부 각료들이 집무 중이었으며, 연말 휴무로 인해 경비 인원은 평소보다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군 병력은 별다른 충돌 없이 주요 출입구와 내부 통로를 확보하였다. 중앙청 2층 총리 집무실 인근에서는 오전 7시 40분대에 총격 사건이 발생하였다. 공식 발표에 따르면, 경비 인력과 군 병력 간의 무력 충돌 과정에서 기요코지 총리는 총상을 입고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군부는 사건 직후 해당 사망을 “작전 수행 중 발생한 불의의 사태”로 규정하고, 추가적인 상세 설명은 제공하지 않았다. 현장은 즉각 통제되었으며, 외부 접근은 차단되었다. 같은 시각, 별동대로 편성된 부대는 내무성을 신속히 장악하였다. 내무대신 후미오는 집무실에서 체포되었으며, 별도의 저항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후미오는 중앙청 지하 통로를 통해 이동된 뒤 군사 시설로 이송되었고, 이후 외부와의 접촉은 전면 차단되었다. 이 체포는 행정 권력의 실질적 붕괴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쿠데타 선언

오전 9시, 수도 내 주요 방송국을 확보한 군부는 특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쿠데타 성공을 공식 선언하였다. 방송에서는 “국가 비상사태”와 “부패한 내각의 해체”가 선포되었으며, 구로다가 국가 재건을 위한 비상통치위원회의 수장임을 공표하였다. 기존 내각은 이 방송을 통해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같은 날 오후, 민주공명회는 전면적인 활동 정지 처분을 받았다. 주요 당 간부 다수는 가택 연금되거나 체포되었으며, 관련 사무실은 군에 의해 봉쇄되었다. 이는 쿠데타 세력이 기존 정치 조직과의 단절을 명확히 하려는 조치로 해석된다. 쿠데타 직후 군부는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정치 활동, 언론 보도, 집회와 시위는 전면 금지되었고, 국회의 기능은 정지되었다. 각 행정 부처에는 군사 고문단이 파견되어 정책 결정과 행정 집행을 감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