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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4" style="background: #001D58; color: #FBC02D;" | 세이류 그룹 주요 계열사 | ! colspan="4" style="background: #001D58; color: #FBC02D;" | 세이류 그룹 주요 계열사 및 기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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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width: 25%; background: #f9f9f9;" | [[세이류 필름]] | | style="width: 25%; background: #f9f9f9;" | [[세이류 필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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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
== 1. 개요 == | |||
<blockquote>눈에 보이지 않는 예술적 전통을 시대에 맞는 감각으로 이어낸다.</blockquote> | <blockquote>눈에 보이지 않는 예술적 전통을 시대에 맞는 감각으로 이어낸다.</blockquot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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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연혁 == | == 2. 연혁 == | ||
* '''1940:''' 세이류 사쿠타로, 세이류문화사(淸流문화사) 설립 | * '''1940:''' 세이류 사쿠타로, 세이류문화사(淸流문화사) 설립 | ||
* '''1945:''' 패전 후 미군정청 군국주의 청산 정책으로 영업 정지 | * '''1945:''' 패전 후 미군정청 군국주의 청산 정책으로 영업 정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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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역사 == | == 3. 역사 == | ||
=== 3.1 창업·초창기 : 전시 체제와 문화 선전(1940년~1945년) === | === 3.1 창업·초창기 : 전시 체제와 문화 선전(1940년~1945년) === | ||
<blockquote>필름은 곧 시대의 거울이며, 그 거울을 닦는 손은 국가의 손이어야 한다. <br /> — 세이류 사쿠타로, 세이류필름 창립 취지문 中 (1940)</blockquote> | <blockquote>필름은 곧 시대의 거울이며, 그 거울을 닦는 손은 국가의 손이어야 한다. <br /> — 세이류 사쿠타로, 세이류필름 창립 취지문 中 (1940)</blockquote> | ||
세이류 그룹의 시초는 1940년, 퇴직 문부성 관료 세이류 사쿠타로(淸流佐久太郎, 1890~1967)가 설립한 세이류문화사이다. 당시 월본은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격랑 속에 있었으며, 국가 총동원령에 따라 문화 산업 전반이 강력한 국가주의적 통제 하에 놓였다. 세이류문화사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퇴직한 고위 관료라는 배경과 축적된 인맥으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 | |||
세이류 그룹의 시초는 1940년, 퇴직 문부성 관료 세이류 사쿠타로(淸流佐久太郎, 1890~1967)가 설립한 세이류문화사이다. 당시 월본은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격랑 속에 있었으며, 국가 총동원령에 따라 문화 산업 전반이 강력한 국가주의적 통제 하에 놓였다. 세이류문화사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퇴직한 고위 관료라는 배경과 축적된 인맥으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 |||
주요 사업 내용은 대동아공영권 이념을 미화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선전 단편영화 및 문화 콘텐츠 제작이었다. 작품들은 미학적, 예술적 깊이보다는 국가 이데올로기 전파와 국민 사기 진작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정부 선전물의 연장선에 있는 선형적인 내러티브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 시기 세이류 사쿠타로는 단순히 이익창출을 목표로 하는 기업 경영을 넘어, 문화적 영역에서 국가 선전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자 했다. | |||
이 시기 《대륙의 빛 (大陸の光)》 (1942), 《농민의 결의 (農民의 決意)》 (1943), 《우리의 아이들, 미래의 전사 (我らの子供、未来의 戦士)》 (1944), 《황국의 새벽》 (皇国の夜明け), 《동아협화의 미 (東亜協和の美)》 (1945) 등의 작품들이 제작되었고, 이 작품들은 종전 이후 미국 국립기록보관소(NARA)로 반출되었다. | |||
=== 3.2 전후 및 영업금지 기간 : 군국주의 청산과 재기의 모색(1945년~1951년) === | === 3.2 전후 및 영업금지 기간 : 군국주의 청산과 재기의 모색(1945년~1951년) === | ||
1945년 월본 패전 이후, 미군정(GHQ)은 강력한 군국주의 청산 정책을 실시했다. 과거 전쟁에 협력했거나 군국주의를 미화했던 기업들은 영업 정지 처분을 받았고, 세이류문화사 역시 그 대상이 되었다. | |||
1945년 월본 패전 이후, 미군정(GHQ)은 강력한 군국주의 청산 정책을 실시했다. 과거 전쟁에 협력했거나 군국주의를 미화했던 기업들은 영업 정지 처분을 받았고, 세이류문화사 역시 그 대상이 되었다. 이는 그룹 역사상 가장 큰 위점이자 공백기로 기록된다. | |||
이 시기 세이류문화사의 기존 영화 제작 시스템과 인력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창업자 세이류 사쿠타로는 전범 재판으로의 회부 위기 등을 겪었으나 별다른 형사적 처분은 받지 않고 6년간 잠적 및 휴식기를 보냈다. 1951년 영업 정지가 해제되면서 제한적인 사업 재개 허가를 받았고, 소규모 문화 사업과 영상물 제작 활동을 중심으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 |||
=== 3.3 영업재개·세이류 필름 설립 : 예술 영화 제작사로의 부상과 국제적 명성 획득(1952년~1960년대 초) === | === 3.3 영업재개·세이류 필름 설립 : 예술 영화 제작사로의 부상과 국제적 명성 획득(1952년~1960년대 초) === | ||
1952년, 월본의 주권 회복과 세이류 문화사의 영업 제한이 해제되자 세이류 사쿠타로는 영화 및 영상물 제작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세이류 필름(SEIRYU FILM)을 공식 설립했다. ( | |||
1952년, 월본의 주권 회복과 세이류 문화사의 영업 제한이 해제되자 세이류 사쿠타로는 영화 및 영상물 제작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세이류 필름(SEIRYU FILM)을 공식 설립했다. 과거의 선전 영화와는 결별하고, 예술성에 초점을 맞춘 다큐멘터리와 예술영화 제작을 새로운 지향점으로 삼아 문부성 산하 '월본 전통예술 진흥계획'의 위탁을 받아 고전문학, 무용극, 무사극 등 전통 소재의 영화 및 방송 콘텐츠를 위탁제작하는 것으로 동시에 재건된 국영방송사들의 다큐멘터리 및 사극의 연출 및 제작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제작물은 민족주의적 연출, 미화된 역사 재구성, 미술·무용·국악 등 전통문화의 ‘정결함’을 강조하는 영상미로 평가받았고 이러한 프로젝트들의 수행의 결과, 사내 수입의 축적과 제작진들의 역량 증진이 이루어지자 세이류 사쿠타로는 1956년, 독자적인 극장을 개장하여 제작-배급-상영으로 이어지는 수직 계열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 |||
과거의 선전영화사적인 성격을 탈피한 세이류 필름은 곧바로 성과를 내기 시작했는데, 1955년 《유성의 절(流星의 寺)》이 월본 금관문화표창상으로 수여되며 국내 영화계의 주목을 받은것에 이어서 결정적인 전환점은 1961년 찾아왔다. 감독 오카자키 켄지(岡崎憲治)와 세이류 사쿠타로가 공동 감독한 《세토의 물소리(瀬戸의 水의 音)》가 세계 최고 권위의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세이류 필름은 월본을 넘어 국제적인 예술 영화 제작사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 |||
세토의 물소리(瀬戸의 물의 소리)는 월본의 자연미와 인간 내면을 깊이 있게 다루며 전후 월본의 침울한 분위기를 위로하는 명작으로 평가받으며 전 세계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1961년 회사명은 세이류문화사에서 간결한 세이류(清流) 변경되었다. 이 시기 세이류가 제작한 작품들은 대체로 보수적으로 작품들도 월본의 역사, 문화 등의 자연인문적 요소의 부정적 측면을 최대한 제거하고 국수주의적이고 전통적 가부장주의, 계층적 미학과 국가주의적 분위기를 띄면서도 그 안에서 약동하는 소시민적 변화와 삶을 담아내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 |||
=== 3.4 순수 예술기 : 세계 양대 영화제를 석권하다(1960년대 중반 ~ 1970년대 말) === | === 3.4 순수 예술기 : 세계 양대 영화제를 석권하다(1960년대 중반 ~ 1970년대 말) === | ||
<blockquote>전통은 가치를 지키되, 시대와 호흡하는 방향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br /> — 세이류 마사노리, 세이류 창립 40주년 연설 中 (1980)</blockquote> | <blockquote>전통은 가치를 지키되, 시대와 호흡하는 방향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br /> — 세이류 마사노리, 세이류 창립 40주년 연설 中 (1980)</blockquote> | ||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말은 세이류 필름의 순수 예술기이자 예술적 정점이었다. 이 시기 그룹은 상업적 성공보다는 미학적 완성도와 예술적 깊이를 추구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 | |||
<blockquote>모든 민족은 스스로의 아픔을 아름답게 연출할 권리가 있다. <br /> — 세이류 마사노리, 월본의 과거사를 은연중에 미화하는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1977)</blockquote> | |||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말은 세이류 필름의 순수 예술기이자 예술적 정점이었다. 이 시기 그룹은 상업적 성공보다는 미학적 완성도와 예술적 깊이를 추구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특히나 이 시기에 전후 무뢰파 성향의 예술가들과 좌익 성향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생계를 위해 입사하고 사쿠타로가 구축한 보수적이고 두터운 내셔널리즘적 성향과 마찰을 빚으면서 일정 부분 실험적 요소와 미학적 복합성을 첨가했고 다채로운 미학적 조류의 혼재가 이루어졌다. 젊은 제작진들은 세이류 내 보수성과 적극적인 충돌 및 마찰을 발생시켰으나 결과적으로는 세이류 특유의 '국가 및 민족주의적 미학 속의 소시민적 서사'라는 양가적 정체성을 확립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결정적으로 세이류 사쿠타로의 사망(1967)으로 더욱 가열차게 이루어졌다. 그 뒤를 이어받은 세이류 마사노리(清流 正則)는 부친의 성향과도 어느정도 상통했으나 다소 진보적인 예술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로인해 70년대에 접어들며 누벨바그(뉴웨이브),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등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며 형식과 미장센적인 실험에 들어서기도 했다. | |||
1968년에는 서양 고전 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세이류 클래식(SEIRYU CLASSIC)을 설립하여 음반 사업에 진출했으나, 이는 1975년 철수하며 그룹의 핵심 역량이 영상 예술에 있음을 재확인했다. 국수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한떄의 탈아입구적 및 구미 열강의 문화에 대한 추종 성향의 영향으로 서양 클래식 음악이 지닌 '문명성'과 '형식미'를 높이 평가하고 유럽과 미국의 음반을 수입, 라이센스를 가져 판매하는 세이류 클래식(SEIRYU CLASSIC)은 많은 명반들과 녹음본을 취입, 제작했지만 동시대의 EMI, DECCA, 도이치 그라모폰 등의 메이저 음반사들을 상대로 한 경쟁에 밀려 저조한 수익성을 보였고 75년 철수를 결정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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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앞서 서술했다시피 세이류의 영화 부문에서 성과는 독보적이었다. 1970년, 세이류 마사노리가 감독한 《달빛 아래 화엄경(月明かりの下의 華厳経)》이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세이류 필름은 칸과 베니스라는 세계 3대 영화제 중 2개를 석권하는 전무후무한 위업을 달성했다. 달빛 아래 화엄경(月明かりの下의 華厳経)은 월본의 불교 철학과 미학을 탁월하게 시각적으로 구현하며 전 세계 영화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로써 세이류 필름은 '월본 예술 영화의 상징'이자 '예술성을 잃지 않는 명문 제작사'로 확고히 이미지화되었다. 연이어 《후루사토(ふるさと)》 (1973), 《벚꽃 골짜기의 노래(桜의 谷의 歌)》 (1975)로 각각 베를린 비경쟁 부분, 로카르노 영화제에 입상하면서 마사노리 개인으로서의 커리어에도 절정을 이루었다. 더군다나 세이류 소속의 작가들이 감독한 영화들도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그 중 특히 이토 나오코(伊藤尚子) 감독의 《잠든 강은 흐른다 (眠った川은 흐른다)》 (1976)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입상에 실패하여 무관에 올랐지만 상당한 고평가를 받기도 했다. | |||
한편, 케이블관으로의 활동 또한 이어나갔는데 1974년에는 ABN의 대하드라마 《명일의 장검(明日の長劍)》의 각본 및 연출을 맡고 텔레비전 콘텐츠 제작에도 참여, 미디어 환경 변화에 대한 유연성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이는 월본의 대하사극 붐의 발단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예술 영화 제작의 수익 구조는 취약성이 강화되었다는 한계 또한 있는데, 《달빛 아래 화엄경(月明かりの下の華厳経)》으로 베니스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베니스를 점령했던 1970년에 정작 세이류 필름의 재정은 22억환에 달하는 적자를 냈을 정도로 심각한 재정난을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본의 재벌계와 각종 단체들의 후원을 통해 70년대 중반부터는 흑자에 접어들며 1977년 도유수도시 문영구에 제2사옥을 매입하며 외형을 확장하기도 했다. | |||
=== 3.5 세이류의 위기 : 노부히로의 승계 이후 시대의 암흑기와 개혁(1980년대 초 ~ 1990년대 중반) === | === 3.5 세이류의 위기 : 노부히로의 승계 이후 시대의 암흑기와 개혁(1980년대 초 ~ 1990년대 중반) === | ||
1970년대 말까지 이어진 세이류 필름의 예술 영화 전성기는 1983년, 2대 오너 세이류 마사노리의 갑작스러운 뇌졸중 발병으로 인해 중대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 | |||
1970년대 말까지 이어진 세이류 필름의 예술 영화 전성기는 1983년, 2대 오너 세이류 마사노리의 갑작스러운 뇌졸중 발병으로 인해 중대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마사노리는 병상에 눕게 되었고, 그의 아들인 3대 세이류 노부히로가 그룹의 업무를 대행하게 되었다. | |||
그러나 노부히로는 창업자 세이류 사쿠타로와 2대 마사노리로 이어지는 탁월한 예술적 감각과 기량을 물려받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예술가 집안에서 성장했지만, 본질적으로 상업적 감각에 능숙했으며 예술적인 역량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실제로 대학 시절 문예학 전공에서는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나, 복수전공으로 선택한 경영학에서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이류 가문의 주인은 마땅히 그룹의 모든 작품 활동을 이끌어야 한다'는 가풍(家風)에 따라, 노부히로는 작품 제작에 직접 뛰어들었다. 1984년, 그가 처음으로 연출한 영화 《바람의 그림자 (風의 影)》는 세이류 필름의 전통적인 예술성과는 거리가 먼, 낮은 완성도로 비평가와 관객 모두에게 실망감을 안겼다. 이후 노부히로의 지휘 아래 제작된 세이류 소속 제작진들의 영화들 또한 전작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퀄리티로 혹평을 받으며, 그룹의 예술적 명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 |||
이러한 위기 상황은 1985년, 병석에서 일어난 마사노리가 잠시 복귀하여 연출한 영화 《은빛 게다 (銀色의 下駄)》를 통해 잠시 해소되는 듯했다. 이 작품은 마사노리 특유의 서정적인 미학과 예술성을 보여주며 간만에 비평가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마사노리는 1986년 타계했고, 이후 세이류 필름은 무려 10년 동안 (1986년부터 1996년까지) 세계 3대 영화제 및 그 밖의 주요 국제 영화제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암흑기를 맞이하게 된다. | |||
예술적 위기 속에서도 노부히로는 탁월한 경영 능력을 발휘하여 그룹의 체질 개선에 집중했다. 노부히로는 이 시기에 그룹의 만성적인 수익성 문제를 해결하고 시스템을 개혁하는 데 매진했는데, 1991년, 노부히로는 작품 제작·연출과 대표이사의 경영 활동을 분리하겠다고 선언하며, 예술가로서의 한계를 인정하고 전문 경영인으로서 그룹을 이끌겠다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이는 예술적 명성을 지키는 동시에 그룹의 재정적 안정을 도모하려는 노부히로의 결단이었다. | |||
1990년대에 들어서 그룹은 방송 외주 제작을 대폭 확대하여 지상파 및 케이블 채널에 다양한 드라마, 다큐멘터리 등을 공급하며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고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했다. 또한, 세이류 필름의 과거 명작들을 리마스터링하는 사업을 개시하여 월본 사회를 새롭게 구성할 X 세대들을 상대로 그룹의 풍부한 유산을 소개하고 추가적인 수익원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펼쳤다. 또한 그간 예술 영화 제작에 투자되는 막대한 비용을 감축하고 사내 유보금으로 재배치, 고도 성장기가 끝나고 내수경제로 전환된 월본의 경제 구조에 따라 부동산 및 증권으로 대표되는 사내 자산 투자(신관야에 세이류 극장 부지 구매 등)를 본격화 하는 등 다양한 노력으로 세이류의 물질적 부분의 개선에 투신했다. 다만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앞서 말했듯이 영화에 투입되는 제작비가 감축된 결과 질적 하락은 막을 수 없었고 미니멀리즘적 연출로 작품의 분위기가 급선회되거나 수많은 기획들이 무산됐고 그로 인해 암흑기의 도래로 이어졌다. 그나마 예술 분야에서 긍정적인 요소를 찾자면 방송 외주 제작 영상물 중 대하사극의 호평과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는 점을 찾을 수 있다. ( 《황혼의 진군(黄昏の進軍)》 (1994, ABN), 《용과 매화(竜과 梅)》(1996, ABN) ) | |||
=== 3.6 복합 콘텐츠 전환기 === | === 3.6 복합 콘텐츠 전환기 === | ||
<blockquote>국가는 언제나 자신을 비추는 영화를 원했고, 우리는 예전에 그것을 만들어왔다. 비판을 피해선 안 되지만, 아름다움 없이도 비판은 완성되지 않는다. <br /> — 세이류 이츠키, 세이류 창립 80주년 연설 中 (2020)</blockquote> | <blockquote>국가는 언제나 자신을 비추는 영화를 원했고, 우리는 예전에 그것을 만들어왔다. 비판을 피해선 안 되지만, 아름다움 없이도 비판은 완성되지 않는다. <br /> — 세이류 이츠키, 세이류 창립 80주년 연설 中 (2020)</blockquote> | ||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세이류 필름의 영화들은 '올드하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전반적인 작품의 색조는 여전히 중후하고 절제된 내러티브, 보수적인 미장센, 묵직한 역사 인식을 유지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 | |||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세이류 필름의 영화들은 '올드하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전반적인 작품의 색조는 여전히 중후하고 절제된 내러티브, 보수적인 미장센, 묵직한 역사 인식을 유지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룹은 이러한 비판에 맞서 여성 서사, 현대적 감수성, 사회적 소외층을 조명하는 작품들을 제작하며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변화의 조짐 속에서 2003년, 여류 감독 가와세 신지(河瀬信子)의 영화 《유리정원(ガラスの庭)》이 예상치 못한 돌풍을 일으켰다. 이 작품은 기존 세이류 필름의 정형화된 스타일에서 벗어나 모더니즘적이고 미니멀리즘하며, 세기말적 감수성과 여성 영화적인 시각을 담아내며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특히 이례적으로 토론토 영화제에 입상하고 월본 박스오피스에서 뜻밖의 흥행을 거두면서, 세이류 필름의 작품 방향성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 성공은 노부히로 경영 시기의 영화 제작에 있어 새로운 시도와 다양성의 중요성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 |||
이와 동시에, 노부히로는 공연 기획 및 극장 운영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며 2001년 세이류 씨어터(SEIRYU THEATER)를 세이류 필름에서 분사하여 독립적인 계열사로 창설했다. 세이류 씨어터는 클래식 공연, 연극 등을 대관하거나 직접 제작, 기획하는 복합 문화기업으로 거듭났다. 이는 수십 년 전 세이류 클래식 계열사의 무참한 실패를 자신의 대에서 유사한 분야로의 재진출을 성공시켜, 세이류 그룹의 헤리티지를 재구축하고 노부히로 자신의 경영적 치적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노부히로의 경영 개혁으로 확보된 탄탄한 재정을 바탕으로, 그룹은 과거 선대의 원로 제작진들의 복귀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2005년, 이례적인 22억 환의 대예산이 투자된 영화 《피안의 노래(彼岸의 歌)》가 35년 만에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다시 수상하며, 10년간의 암흑기를 완전히 종식시키고 세이류 필름의 영광을 재건하는 상징적인 작품이 되었고 그룹의 재정적 안정과 예술적 역량 회복의 증거로 평가받았다. | |||
이러한 대내외적 성과에 힘입어 2005년, 세이류 그룹은 월본 국가적 명예인 국민영예상(國民榮譽賞)을 수상하며 사회적으로도 그 공헌을 인정받았다. 2013년, 3대 오너 노부히로가 고령을 사유로 사임하고, 4대 세이류 이츠키 대표직을 이어받아 그룹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츠키 체제에서도 영화 제작 부문은 예술성을 고수하며 만성적인 적자 구조를 유지하고 있지만, 방송사의 각종 외주 작업과 굿즈 판매, 각종 영화 드라마 판권 수에 더불어 그룹이 보유한 적지않은 부동산 자산을 활용한 임대업에서 발생하는 영업외 이익이 이를 상쇄하며 전체 순이익을 방어하는 안정적인 경영 구조를 확립했다. 2020년에는 그룹 공식 창립 80주년을 맞이하며, 기업의 매출 규모를와 상업적 성과를 떠나서 명실상부 월본 문화 예술계를 대표하는 기업집단으로서 그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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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2월 21일 (토) 15:57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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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이류 그룹 SEIRYU GROUP 清流グループ | |||||||||||
|---|---|---|---|---|---|---|---|---|---|---|---|
| 설립일 | 1940. 07. 11 (86주년) | ||||||||||
| 대표이사 | 세이류 이츠키(清流 樹) | ||||||||||
| 본사 주소 | 도유중앙시 중앙구 신주초 12-1 | ||||||||||
| 업종 | 엔터테인먼트 | ||||||||||
[ 재무 및 상세 정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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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술적 전통을 시대에 맞는 감각으로 이어낸다.
세이류 그룹(淸流グループ / Seiryu Group)은 1940년 7월 11일, 도유수도시에서 설립된 전통미학 기반의 영상·문화 종합 기업 집단이다. 설립 이래 세이류(淸流) 가문이 4대에 걸쳐 경영권을 세습해 왔으며, 핵심 계열사인 세이류 필름(Seiryu Film)을 중심으로 예술영화 제작, 방송 외주, 공연·극장 운영, 팬시 상품(fancy goods), 부동산 임대 등 다각화된 사업 포트폴리오를 운영하고 있다.
역사와 시간, 기억, 국가와 그 내의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작품 세계관을 구축해왔다. 작품 하나하나에 문학, 고전예술, 역사, 철학, 무형문화의 향기를 내재하는 것을 목적과 사명으로 삼아 '대중성과 품격의 교차점'을 찾는 집요한 연출력과 뛰어난 제작진의 기량으로 현재도 월본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제작사 중 하나이다.
2. 연혁
- 1940: 세이류 사쿠타로, 세이류문화사(淸流문화사) 설립
- 1945: 패전 후 미군정청 군국주의 청산 정책으로 영업 정지
- 1951: 영업정지 해제, 제한적 사업 재개
- 1952: 예술영화, 다큐멘터리 등 영상물 전문 제작사로 세이류 필름 공식 설립 및 극장 개장
- 1955: 《유성의 절(流星の寺)》, 월본 금관문화표창상 수상
- 1958: 세이류문화사 -> 세이류(淸流) 기업명 변경
- 1961: 《세토의 물소리(瀬戸의 물의 소리)》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 1965: 초대 세이류 사쿠타로 대표직 사임, 세이류 마사노리가 승계
- 1968: 서양 고전 음악 음반 취입 사업 확장, 세이류 클래식(SEIRYU CLASSIC) 설립
- 1970: 《달빛 아래 화엄경(月明かりの下의 華厳経)》 베니스 황금사자상 수상
- 1975: 서양 고전 음악 사업 철수
- 1977: 제 2 사옥(도유수도시 문영구 소재) 매입 및 운영
- 1985: 2대 오너 세이류 마사노리 사망, 세이류 노부히로 3대 대표 취임
- 1991: 세이류 노부히로, 작품 제작 및 연출 <-> 대표 이사 경영 활동 분리 발표
- 1990년대: 지상파, 케이블 방송 외주 증가, 과거 창작물 리마스터링 사업 개시
- 2001: 공연기획 및 극장 운영 사업 진출, 세이류 씨어터(SEIRYU THEATER) 설립
- 2005: 《피안의 노래(彼岸의 歌)》 35년만의 베니스 황금사자상 수상
- 2005: 세이류 그룹, 월본 국민영예상(國民榮譽賞) 수상
- 2007: 세이류 필름보관소, 세이류 박물관 개장(도유수도시 중앙구 소재)
- 2013: 3대 오너 세이류 노부히로 사임, 4대 세이류 이츠키 대표 취임
- 2020: 그룹 공식 창립 80주년 기념
3. 역사
3.1 창업·초창기 : 전시 체제와 문화 선전(1940년~1945년)
필름은 곧 시대의 거울이며, 그 거울을 닦는 손은 국가의 손이어야 한다.
— 세이류 사쿠타로, 세이류필름 창립 취지문 中 (1940)
세이류 그룹의 시초는 1940년, 퇴직 문부성 관료 세이류 사쿠타로(淸流佐久太郎, 1890~1967)가 설립한 세이류문화사이다. 당시 월본은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격랑 속에 있었으며, 국가 총동원령에 따라 문화 산업 전반이 강력한 국가주의적 통제 하에 놓였다. 세이류문화사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퇴직한 고위 관료라는 배경과 축적된 인맥으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주요 사업 내용은 대동아공영권 이념을 미화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선전 단편영화 및 문화 콘텐츠 제작이었다. 작품들은 미학적, 예술적 깊이보다는 국가 이데올로기 전파와 국민 사기 진작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정부 선전물의 연장선에 있는 선형적인 내러티브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 시기 세이류 사쿠타로는 단순히 이익창출을 목표로 하는 기업 경영을 넘어, 문화적 영역에서 국가 선전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자 했다.
이 시기 《대륙의 빛 (大陸の光)》 (1942), 《농민의 결의 (農民의 決意)》 (1943), 《우리의 아이들, 미래의 전사 (我らの子供、未来의 戦士)》 (1944), 《황국의 새벽》 (皇国の夜明け), 《동아협화의 미 (東亜協和の美)》 (1945) 등의 작품들이 제작되었고, 이 작품들은 종전 이후 미국 국립기록보관소(NARA)로 반출되었다.
3.2 전후 및 영업금지 기간 : 군국주의 청산과 재기의 모색(1945년~1951년)
1945년 월본 패전 이후, 미군정(GHQ)은 강력한 군국주의 청산 정책을 실시했다. 과거 전쟁에 협력했거나 군국주의를 미화했던 기업들은 영업 정지 처분을 받았고, 세이류문화사 역시 그 대상이 되었다. 이는 그룹 역사상 가장 큰 위점이자 공백기로 기록된다.
이 시기 세이류문화사의 기존 영화 제작 시스템과 인력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창업자 세이류 사쿠타로는 전범 재판으로의 회부 위기 등을 겪었으나 별다른 형사적 처분은 받지 않고 6년간 잠적 및 휴식기를 보냈다. 1951년 영업 정지가 해제되면서 제한적인 사업 재개 허가를 받았고, 소규모 문화 사업과 영상물 제작 활동을 중심으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3.3 영업재개·세이류 필름 설립 : 예술 영화 제작사로의 부상과 국제적 명성 획득(1952년~1960년대 초)
1952년, 월본의 주권 회복과 세이류 문화사의 영업 제한이 해제되자 세이류 사쿠타로는 영화 및 영상물 제작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세이류 필름(SEIRYU FILM)을 공식 설립했다. 과거의 선전 영화와는 결별하고, 예술성에 초점을 맞춘 다큐멘터리와 예술영화 제작을 새로운 지향점으로 삼아 문부성 산하 '월본 전통예술 진흥계획'의 위탁을 받아 고전문학, 무용극, 무사극 등 전통 소재의 영화 및 방송 콘텐츠를 위탁제작하는 것으로 동시에 재건된 국영방송사들의 다큐멘터리 및 사극의 연출 및 제작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제작물은 민족주의적 연출, 미화된 역사 재구성, 미술·무용·국악 등 전통문화의 ‘정결함’을 강조하는 영상미로 평가받았고 이러한 프로젝트들의 수행의 결과, 사내 수입의 축적과 제작진들의 역량 증진이 이루어지자 세이류 사쿠타로는 1956년, 독자적인 극장을 개장하여 제작-배급-상영으로 이어지는 수직 계열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과거의 선전영화사적인 성격을 탈피한 세이류 필름은 곧바로 성과를 내기 시작했는데, 1955년 《유성의 절(流星의 寺)》이 월본 금관문화표창상으로 수여되며 국내 영화계의 주목을 받은것에 이어서 결정적인 전환점은 1961년 찾아왔다. 감독 오카자키 켄지(岡崎憲治)와 세이류 사쿠타로가 공동 감독한 《세토의 물소리(瀬戸의 水의 音)》가 세계 최고 권위의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세이류 필름은 월본을 넘어 국제적인 예술 영화 제작사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세토의 물소리(瀬戸의 물의 소리)는 월본의 자연미와 인간 내면을 깊이 있게 다루며 전후 월본의 침울한 분위기를 위로하는 명작으로 평가받으며 전 세계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1961년 회사명은 세이류문화사에서 간결한 세이류(清流) 변경되었다. 이 시기 세이류가 제작한 작품들은 대체로 보수적으로 작품들도 월본의 역사, 문화 등의 자연인문적 요소의 부정적 측면을 최대한 제거하고 국수주의적이고 전통적 가부장주의, 계층적 미학과 국가주의적 분위기를 띄면서도 그 안에서 약동하는 소시민적 변화와 삶을 담아내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3.4 순수 예술기 : 세계 양대 영화제를 석권하다(1960년대 중반 ~ 1970년대 말)
전통은 가치를 지키되, 시대와 호흡하는 방향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 세이류 마사노리, 세이류 창립 40주년 연설 中 (1980)
모든 민족은 스스로의 아픔을 아름답게 연출할 권리가 있다.
— 세이류 마사노리, 월본의 과거사를 은연중에 미화하는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1977)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말은 세이류 필름의 순수 예술기이자 예술적 정점이었다. 이 시기 그룹은 상업적 성공보다는 미학적 완성도와 예술적 깊이를 추구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특히나 이 시기에 전후 무뢰파 성향의 예술가들과 좌익 성향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생계를 위해 입사하고 사쿠타로가 구축한 보수적이고 두터운 내셔널리즘적 성향과 마찰을 빚으면서 일정 부분 실험적 요소와 미학적 복합성을 첨가했고 다채로운 미학적 조류의 혼재가 이루어졌다. 젊은 제작진들은 세이류 내 보수성과 적극적인 충돌 및 마찰을 발생시켰으나 결과적으로는 세이류 특유의 '국가 및 민족주의적 미학 속의 소시민적 서사'라는 양가적 정체성을 확립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결정적으로 세이류 사쿠타로의 사망(1967)으로 더욱 가열차게 이루어졌다. 그 뒤를 이어받은 세이류 마사노리(清流 正則)는 부친의 성향과도 어느정도 상통했으나 다소 진보적인 예술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로인해 70년대에 접어들며 누벨바그(뉴웨이브),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등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며 형식과 미장센적인 실험에 들어서기도 했다.
1968년에는 서양 고전 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세이류 클래식(SEIRYU CLASSIC)을 설립하여 음반 사업에 진출했으나, 이는 1975년 철수하며 그룹의 핵심 역량이 영상 예술에 있음을 재확인했다. 국수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한떄의 탈아입구적 및 구미 열강의 문화에 대한 추종 성향의 영향으로 서양 클래식 음악이 지닌 '문명성'과 '형식미'를 높이 평가하고 유럽과 미국의 음반을 수입, 라이센스를 가져 판매하는 세이류 클래식(SEIRYU CLASSIC)은 많은 명반들과 녹음본을 취입, 제작했지만 동시대의 EMI, DECCA, 도이치 그라모폰 등의 메이저 음반사들을 상대로 한 경쟁에 밀려 저조한 수익성을 보였고 75년 철수를 결정한다. 하지만 앞서 서술했다시피 세이류의 영화 부문에서 성과는 독보적이었다. 1970년, 세이류 마사노리가 감독한 《달빛 아래 화엄경(月明かりの下의 華厳経)》이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세이류 필름은 칸과 베니스라는 세계 3대 영화제 중 2개를 석권하는 전무후무한 위업을 달성했다. 달빛 아래 화엄경(月明かりの下의 華厳経)은 월본의 불교 철학과 미학을 탁월하게 시각적으로 구현하며 전 세계 영화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로써 세이류 필름은 '월본 예술 영화의 상징'이자 '예술성을 잃지 않는 명문 제작사'로 확고히 이미지화되었다. 연이어 《후루사토(ふるさと)》 (1973), 《벚꽃 골짜기의 노래(桜의 谷의 歌)》 (1975)로 각각 베를린 비경쟁 부분, 로카르노 영화제에 입상하면서 마사노리 개인으로서의 커리어에도 절정을 이루었다. 더군다나 세이류 소속의 작가들이 감독한 영화들도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그 중 특히 이토 나오코(伊藤尚子) 감독의 《잠든 강은 흐른다 (眠った川은 흐른다)》 (1976)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입상에 실패하여 무관에 올랐지만 상당한 고평가를 받기도 했다.
한편, 케이블관으로의 활동 또한 이어나갔는데 1974년에는 ABN의 대하드라마 《명일의 장검(明日の長劍)》의 각본 및 연출을 맡고 텔레비전 콘텐츠 제작에도 참여, 미디어 환경 변화에 대한 유연성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이는 월본의 대하사극 붐의 발단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예술 영화 제작의 수익 구조는 취약성이 강화되었다는 한계 또한 있는데, 《달빛 아래 화엄경(月明かりの下の華厳経)》으로 베니스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베니스를 점령했던 1970년에 정작 세이류 필름의 재정은 22억환에 달하는 적자를 냈을 정도로 심각한 재정난을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본의 재벌계와 각종 단체들의 후원을 통해 70년대 중반부터는 흑자에 접어들며 1977년 도유수도시 문영구에 제2사옥을 매입하며 외형을 확장하기도 했다.
3.5 세이류의 위기 : 노부히로의 승계 이후 시대의 암흑기와 개혁(1980년대 초 ~ 1990년대 중반)
1970년대 말까지 이어진 세이류 필름의 예술 영화 전성기는 1983년, 2대 오너 세이류 마사노리의 갑작스러운 뇌졸중 발병으로 인해 중대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마사노리는 병상에 눕게 되었고, 그의 아들인 3대 세이류 노부히로가 그룹의 업무를 대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부히로는 창업자 세이류 사쿠타로와 2대 마사노리로 이어지는 탁월한 예술적 감각과 기량을 물려받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예술가 집안에서 성장했지만, 본질적으로 상업적 감각에 능숙했으며 예술적인 역량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실제로 대학 시절 문예학 전공에서는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나, 복수전공으로 선택한 경영학에서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이류 가문의 주인은 마땅히 그룹의 모든 작품 활동을 이끌어야 한다'는 가풍(家風)에 따라, 노부히로는 작품 제작에 직접 뛰어들었다. 1984년, 그가 처음으로 연출한 영화 《바람의 그림자 (風의 影)》는 세이류 필름의 전통적인 예술성과는 거리가 먼, 낮은 완성도로 비평가와 관객 모두에게 실망감을 안겼다. 이후 노부히로의 지휘 아래 제작된 세이류 소속 제작진들의 영화들 또한 전작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퀄리티로 혹평을 받으며, 그룹의 예술적 명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러한 위기 상황은 1985년, 병석에서 일어난 마사노리가 잠시 복귀하여 연출한 영화 《은빛 게다 (銀色의 下駄)》를 통해 잠시 해소되는 듯했다. 이 작품은 마사노리 특유의 서정적인 미학과 예술성을 보여주며 간만에 비평가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마사노리는 1986년 타계했고, 이후 세이류 필름은 무려 10년 동안 (1986년부터 1996년까지) 세계 3대 영화제 및 그 밖의 주요 국제 영화제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암흑기를 맞이하게 된다.
예술적 위기 속에서도 노부히로는 탁월한 경영 능력을 발휘하여 그룹의 체질 개선에 집중했다. 노부히로는 이 시기에 그룹의 만성적인 수익성 문제를 해결하고 시스템을 개혁하는 데 매진했는데, 1991년, 노부히로는 작품 제작·연출과 대표이사의 경영 활동을 분리하겠다고 선언하며, 예술가로서의 한계를 인정하고 전문 경영인으로서 그룹을 이끌겠다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이는 예술적 명성을 지키는 동시에 그룹의 재정적 안정을 도모하려는 노부히로의 결단이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 그룹은 방송 외주 제작을 대폭 확대하여 지상파 및 케이블 채널에 다양한 드라마, 다큐멘터리 등을 공급하며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고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했다. 또한, 세이류 필름의 과거 명작들을 리마스터링하는 사업을 개시하여 월본 사회를 새롭게 구성할 X 세대들을 상대로 그룹의 풍부한 유산을 소개하고 추가적인 수익원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펼쳤다. 또한 그간 예술 영화 제작에 투자되는 막대한 비용을 감축하고 사내 유보금으로 재배치, 고도 성장기가 끝나고 내수경제로 전환된 월본의 경제 구조에 따라 부동산 및 증권으로 대표되는 사내 자산 투자(신관야에 세이류 극장 부지 구매 등)를 본격화 하는 등 다양한 노력으로 세이류의 물질적 부분의 개선에 투신했다. 다만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앞서 말했듯이 영화에 투입되는 제작비가 감축된 결과 질적 하락은 막을 수 없었고 미니멀리즘적 연출로 작품의 분위기가 급선회되거나 수많은 기획들이 무산됐고 그로 인해 암흑기의 도래로 이어졌다. 그나마 예술 분야에서 긍정적인 요소를 찾자면 방송 외주 제작 영상물 중 대하사극의 호평과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는 점을 찾을 수 있다. ( 《황혼의 진군(黄昏の進軍)》 (1994, ABN), 《용과 매화(竜과 梅)》(1996, ABN) )
3.6 복합 콘텐츠 전환기
국가는 언제나 자신을 비추는 영화를 원했고, 우리는 예전에 그것을 만들어왔다. 비판을 피해선 안 되지만, 아름다움 없이도 비판은 완성되지 않는다.
— 세이류 이츠키, 세이류 창립 80주년 연설 中 (2020)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세이류 필름의 영화들은 '올드하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전반적인 작품의 색조는 여전히 중후하고 절제된 내러티브, 보수적인 미장센, 묵직한 역사 인식을 유지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룹은 이러한 비판에 맞서 여성 서사, 현대적 감수성, 사회적 소외층을 조명하는 작품들을 제작하며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변화의 조짐 속에서 2003년, 여류 감독 가와세 신지(河瀬信子)의 영화 《유리정원(ガラスの庭)》이 예상치 못한 돌풍을 일으켰다. 이 작품은 기존 세이류 필름의 정형화된 스타일에서 벗어나 모더니즘적이고 미니멀리즘하며, 세기말적 감수성과 여성 영화적인 시각을 담아내며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특히 이례적으로 토론토 영화제에 입상하고 월본 박스오피스에서 뜻밖의 흥행을 거두면서, 세이류 필름의 작품 방향성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 성공은 노부히로 경영 시기의 영화 제작에 있어 새로운 시도와 다양성의 중요성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노부히로는 공연 기획 및 극장 운영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며 2001년 세이류 씨어터(SEIRYU THEATER)를 세이류 필름에서 분사하여 독립적인 계열사로 창설했다. 세이류 씨어터는 클래식 공연, 연극 등을 대관하거나 직접 제작, 기획하는 복합 문화기업으로 거듭났다. 이는 수십 년 전 세이류 클래식 계열사의 무참한 실패를 자신의 대에서 유사한 분야로의 재진출을 성공시켜, 세이류 그룹의 헤리티지를 재구축하고 노부히로 자신의 경영적 치적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노부히로의 경영 개혁으로 확보된 탄탄한 재정을 바탕으로, 그룹은 과거 선대의 원로 제작진들의 복귀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2005년, 이례적인 22억 환의 대예산이 투자된 영화 《피안의 노래(彼岸의 歌)》가 35년 만에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다시 수상하며, 10년간의 암흑기를 완전히 종식시키고 세이류 필름의 영광을 재건하는 상징적인 작품이 되었고 그룹의 재정적 안정과 예술적 역량 회복의 증거로 평가받았다.
이러한 대내외적 성과에 힘입어 2005년, 세이류 그룹은 월본 국가적 명예인 국민영예상(國民榮譽賞)을 수상하며 사회적으로도 그 공헌을 인정받았다. 2013년, 3대 오너 노부히로가 고령을 사유로 사임하고, 4대 세이류 이츠키 대표직을 이어받아 그룹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츠키 체제에서도 영화 제작 부문은 예술성을 고수하며 만성적인 적자 구조를 유지하고 있지만, 방송사의 각종 외주 작업과 굿즈 판매, 각종 영화 드라마 판권 수에 더불어 그룹이 보유한 적지않은 부동산 자산을 활용한 임대업에서 발생하는 영업외 이익이 이를 상쇄하며 전체 순이익을 방어하는 안정적인 경영 구조를 확립했다. 2020년에는 그룹 공식 창립 80주년을 맞이하며, 기업의 매출 규모를와 상업적 성과를 떠나서 명실상부 월본 문화 예술계를 대표하는 기업집단으로서 그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